::: 이젠 다 쓰러져가는 보금자리 ~스물라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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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고 긴 하루 -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참 길기만 한 하루였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만. 해야할 일은 있는지라.

집을 나섰다.



햇살은 따스하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그리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가끔 담배도 피웠다.



한가하진 않은데. 뭘 하고 있는지 집중도 잘 되지 않고...

뭘 하고 있는건지도 잘 모르겠고.





"일"을 하는 중에. 문득 답답한 생각이 들어.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한캔 사서 마셨다.

속이 좋지 않아 먹을 것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맥주만큼은 참 시원했다.



이틀째 잠도 자지 않고. 술만 마셔댔는데. 몸이 상하는건지. 아닌건지.

그렇게 점심때가 왔다.





- 이성과 감정 -

왠만해서는 울릴리 없는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시큰둥하게 반 기계적으로 폰의 슬라이드를 올렸다.

혜진이다. 오늘 오후에 시간 낼 수 있냐는 짧은 문자.

평소와 다른거라곤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었다는 것 뿐이였다.



그정도로도 얼마나 날 적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의욕은 없는만큼 마음도 꽤나 차분해져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짧은 문자 알림음에 파도치기 시작한 마음은 또 끝없이 꿈틀거려댔다.



그래. 시간이 되면 만나자고 한건 나였다.

머리에 피가 쏠려서. 뭔지도 모르고 욕하고. 때려주고 싶어서.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땐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나중에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아침에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간 뒤엔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미운털이 박혔으니. 혜진이가 날 보려고 하지 않을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있었는데 문자가 와 버렸다. 시간 되냐고.



잠시 멍하게 있자니 손에 들린 맥주캔의 무게가 느껴졌다.

할일이 태산 같은데... 잠시 스텝에게 안내를 구한뒤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까까지 시원했던 맥주가 조금 목을 따갑게 한다.



만나도 할 이야기도 없는데. 이제 되돌릴 수 있는것도 없는데.

역시. 만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어느새 약속을 잡고 있었다.

바쁘면 안 만나도 된다.

라는 식으로 몸을 비틀어봤지만. 결국 시간과 장소를 잡았다.



결국 나는 일을 빼먹고 일찍 천안으로 돌아왔다.





-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

혜진이 만나러 간다는 말에 반대하던 민석이는. 이내 생각을 고친 듯 했다.

어차피 누가 뭐라고 해봐야 하고 싶은건 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런걸 알기 때문에 친구들이 뭘 하면 잔소리는 할 지언정 하고 싶은건 막지 않는 편이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곧 민석이는. 가서 이야기 잘 하고 와라.

그대신 죽고 싶니 어쩌니 하는 부정적 마인드도 모두 버리고 오라고.

그렇게 말해줬다.



그래. 친구들의 관심을 듣고 싶은 것만 주워들은 나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혜진이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내일이 시험인데. -_-





- 마지막 만남 -

생각해보면 "이걸로 마지막이다."라는 말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맵고 끊는걸 잘 하지 못하고. 마음도 적당적당히 여린 나는.

무엇인가를 끝내는걸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다.



헤어진 이후로 다시는 못 볼줄 알았던 혜진이도. 실제로 꽤 만났던 것 같다.

별다른 의미도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내 고집으로 만났던게 많았다.

오늘도 그렇다. 그런데 가능하면 오늘이 정말 내 고집으로 만나는 마지막 만남이였음 좋겠다.



적어도 이후에 다시 만난다면.

우연히 길에서 만나거나. 그 아이가 날 찾아주길.





쌀쌀맞은 모습은 몇번 봐서 익숙했다.

존댓말 하는건 어색했지만. 그것도 그런가보다 싶었다.



굳이 할 이야기도 없었지만 밖에서 서 있기도 뭣해서 근처의 술집에 갔다.

배고프지 않다는 혜진이 말에 나만 맥주를 한잔 시켰다.

가격표를 보고 나니. 둘이서 고작 맥주 한잔 마시고 갈 생각에 가게 주인에게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건 어쩔 수 없는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사장님.



역시나 별다른 이야기는 안했다.

원망하지 않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나름 진정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몇가지 했다.



지금 생각나는건.

이유는 알수 없지만 괜히 그렁그렁했던 꼬맹이의 눈.

왜 그렁그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울지 않아줘서 정말 고맙다.




같이 있던 마지막 시간. 마지막이 아니면 좋으련만.

무거운 공기는. 괜히 맥주만 자꾸 목에 삼켜지게 만들어버렸다.



아. 그러고보니 이틀이나 잠을 못잤지.

이틀 밤 내내 술만 마셨지. 내일이 시험인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여기서 이러는걸까.



알 수 없어서. 나는 맥주를 계속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 안아달라고 꼬맹이에게 말했다. -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서 혜진이와 함께 있다는게 아무의미 없다는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까 문자를 받았을때도 거절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거절하지 못했고. 결국 이렇게 나와서 마주 앉아 있었다.



그래. 그냥 보고 싶었다.





딱히 내가 어떻다. 쟤가 어떻다. 라고 할 생각은 아니고.

그냥 보고 싶어서 나왔다. 막상 보니까 다시 감정이 일렁거렸다.

그것 뿐이였다.



오랫동안 알아왔기 때문이였을까.

내가 그런 성격이기 때문일까. 처음의 싸늘했던 분위기는 조금 풀려 있었다.

이제는 어느정도 대화가 오가기도 했고.

시종일관 냉담하던 혜진이는 배고프다며 안주를 시켜서 혼자 깨끗하게 다 먹어 치우기도 했다.

나도 맥주를 두어잔 더 마셨다.

혜진이가 먹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예뻐보여 눈물이 났다.



혜진이가 정말 객관적으로 예뻐서가 아니다.

내가 정말 못나서 그 사람에게 반한 것도 아니다.

그냥. 좋았다.





술집을 나왔다.

마땅히 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보내기도 싫었다.

이젠 말 걸면 대답도 잘 해 준다.

싸늘하게 높임말을 쓰던 말투도 어느덧 평소와 같다.



그건 그대로도 좋았지만. 소름이 돋았다.

혜진이가 아닌. 나한테. 나라는 인간에게 소름이 돋았다.

오늘 이렇게 헤어진다면. 또 마음이 약해지면. 당연하다는 듯이 기대려고 하지 않을까.



내 억지로 만나는건 여기까지였으면 좋겠다.

다음에 만나는건. 우연히. 혹은 그 아이가 날 찾아서...

그게 아니라면 괴로워도.

어차피 나도 언젠가는 잊을테고. 새 사람도 만날테고. 아마도 그럴테니까.





취기가 조금 올랐다.

몸이 말이 아니다. 몇일간 잠도 못잤고.

어젯밤엔 술도 진탕 마셨고...

그리고. 눈앞의 꼬맹이가 왠지 모르게 예뻐보여서 좋았고. 짜증도 났다.



그래. 몇일전에 머리에 피가 오른것보다.

니가 너무 쉽게 떠나간게 지금은 더 짜증이 나.

지금 니가 다른 사람 옆에 있다는게 더 짜증이 나.

헤어지자고 말했던 나한테 짜증이 나.

...물론 말하진 않았다.

혜진이에게야 별다른 것 없었겠지만.

나한테는 뭔가 부드러워진 지금의 분위기가 덜컥 겁이 났다.

또 제자리 걸음하는건 아닐까.

나 또 내일 아무렇지도 않게 목소리 듣고 싶다고 전화하는거 아냐?





그래서 말했다.



"안아줘."



물론 혜진이는 화를 냈다.

술먹고 미친짓 하지 말라면서. 화를 냈다.




물론 사실 안고 싶었다.

그런데 아마. 혜진이가 뭐라고 했던간에. 나는 안지 못했을거야.

그래봐야 변하는 것도 없고. 임자 있는 여자는 건들면 벌 받는 법.

그리고 난 싫다는거 억지로 하는 취미도 없고...

안았다면. 더 슬플거 같아서.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선 기분 나빴겠지.

더이상 내가 뭔 말을 해도 믿을 수 없었겠지. 이해하지만 씁쓸하다.



이제 빼도박도 못하고 인생 최악의 남자로 기억되게 되겠구나.

왠지 슬프다. 난 왜이렇게 뭔가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건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한편으론 안고 싶기도 했다.

그냥 모든 상황이 리셋되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귀고 있을때의 나는 뭐가 그리 불만이였나.

우리는 어디서 그렇게 뒤틀리고 있었나.

난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상대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했던 걸까.

헤어지자고 해도 상대방이 잡아줄거라고 믿었을까.




뭐 어찌됐던간에. 안고는 싶지만 안지는 못한다.





에라이 이놈의 모순아.



결국 혜진이가 어떻게 대답했듯 별다른 일은 없었겠지만.

역시나 혜진이는 화를 냈고. 그대로 가버렸다.

한숨을 쉬고. 커피를 한잔 샀다. 밤공기가 차서 술도 금방 깨는 것 같았다.

문득 몇일동안 잠 못잔게 생각났다.

지금 당장 풀썩 쓰러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을텐데.

문득 그래도 좋은 분위기일때 보냈어야 했던 걸까. 잠깐 생각했다.



끝이라도 좋아야 하는거 아니였을까.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꿈꾸고 싶다. 이대로 살다가. 어느날 문득.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게임같다고들 하잖아(웃음).













너무 길었다...



앞으로는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조용히. 감정을 정리해봐야겠다.

여전히 좋아한다고 해도. 굳이 상대방에게 그런 감정을 표현할 필요 없고.

이미 지난 옛날 일로 누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할 것도 없다.

이젠 그냥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군생활 하던 시절. 내가 다시 혜진이를 찾았을때 그 아이는 어떤 기분이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혜진이를 기억했던 것처럼 혜진이가 나를 떠올릴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전에 그랬듯이 우리가 다시 서로의 일을 딛고 사랑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혜진이가 그랬듯 전의 일들 덮어놓고 내가 다시 혜진이를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것 없어도 우리가 다시 편한 오빠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어쨋거나. 다 끝났다.

관계라는 지긋지긋한 형태는 끝났다.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지만.

인연이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꼭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길.

이왕이면 꽤 자연스럽게 얼렁뚱땅 다시 사랑할 수 있는게 제일 좋고(이놈의 미련이란. 웃음).



이제서야. 맘껏 좋아한다. 라는걸 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단순해서 어쩔 수 없어. -_-

사람에게 매달리면 매력없다. 왜냐면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거든.

그래서 이젠 좋아하더라도 내 일상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한다. 아자아아아아아앗!!!





...이거 상대방은 나를 지금 세계 최악의 남자로 생각하고 있거나.

혹은 기억에서 지워서 이미 안드로메다로 던져버렸을텐데.

나는 오히려 나름대로 정리하고 이제 나름대로 좋아해보겠다니. 단순한건지 멍청한건지.





우중충하지만 묘하게 상쾌한 기분에 웃었다.



길었던 방황도. 사건 사고도. 일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