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젠 다 쓰러져가는 보금자리 ~스물라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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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너무나 빠르다 -

토요일이다.

평소라면 밀린 잠을 실컷 자두려고 침대에서 뒹굴거렸겠지만.

오늘은 그런 사치는 누릴 생각도 않고 일찍 일어났다.

내 방은 아침에만 일조량이 많기 때문에

눈을 떴을 때 방안의 밝기를 보면 대충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 해시계 아닌 해시계.

어쨋거나... 너무 일찍 일어났다.



시간 참 잘 간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적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냥저냥 흘러갔던 하루. 죽을 것 같이 시간이 멈췄던거 같은 날도 있었는데.

어느덧 1년이나 지났다는 생각에 솔직히 좀 놀랐다.



그렇지. 작년 이맘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지.

...오늘은 할머니의 첫 제사가 있는 날...이다. 벌써. 1년. 이구나.




- 아버지의 뒷모습 -

점심때쯤 아버지가 오셨다.

마침 오늘 천안에 출장 올 일이 있으시다고. 오신 김에 픽업해 주신다길래.

교통비도 아낄 겸. 간만에 아버지와 둘만의 시간도 가질 겸 그러겠노라고 했다.



조수석에 앉아 신탄진으로 가는 고속도로.

늘 그렇듯 아버지는 짧게 내 안부를 물으셨고.

나도 늘 그렇듯 모범적인 짧은 답만 했다.

어머니께서는 부자간에 너무 교류가 없다고 늘 답답해하셨는데.

확실히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와는 조금 어렵다.

아버지가 싫거나 한건 아닌데...



이윽고 드문드문 이어지던 대화마저도 끊겨버렸고.

우리는 묵묵히 창밖만 바라봤다.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았기 때문에 신탄진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큰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내게 혜진이 안부를 물으신다.

딱 한번. 혜진이가 귀국한 직후.

정말 이제는 이 아이와 계속 함께 할 거라고 믿었던. 혹은 자만했던 그때.

명절에 처음으로 여자친구의 존재를 친척들께 알렸다.

우리 가족들이야 알던 이야기지만. 친척들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은 처음이였다.

우습게도 머지않아 헤어졌지만. 헤어지고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일년에 드문드문 한두번 만나는 친척들에게 있어서는.

혜진이는 여전히 현재형이였고 내게 있어서는 자연스런 안부 인사의 수식어였다.

헤어지고 마음 다잡는데도 오래 걸렸거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혜진이 이야기.

이별은 나에게.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에게서 모두 잊혀질 때까지 계속된다고 했던가.





아버지께서 할머니 산소에 들리자고 하셨다.

제사는 밤이니까 시간도 제법 남았고.

첫 제사이니만큼 한번 들러서 인사드리고 싶다고 하시면서.



근처 구멍가게에서 포와 막걸리를 샀다.

그리고 명절. 벌초때를 제외하곤 처음으로 산소에 들렀다.

1년전. 벌써 1년이 지나버렸다.

나는 좀 자랐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가운데 산소에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먼저 산을 오르셨고 내가 뒤따랐다.

...그제서야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만 보고. 차에서는 옆모습만 봤기 때문에 몰랐는데.

아버지의 뒤에서야.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버지의 뒷머리. 하얗게 새어버린 아버지의 머리.

늘 염색을 하셨기 때문에. 또 자주 뵙지 못하기 때문에 못 보고 지나쳤는데.

아니. 오늘만 해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아버지 뒤에 서고 나서야 아버지의 하얗게 샌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뭔가 왈칵 치밀어 올라왔다.



오는 길에 혜진이 생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셨고 할머니 묘에 잔을 올리셨다.

나도 올렸다. 절을 했다.





- 할머니 제사 -

요 근래 가족행사 중엔 가장 많이 모인 날이였던 것 같다.

그만큼 첫 제사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지만.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다는 건 조금 싫었다. 명절땐 오지도 않더니...




그래도 제사는 무사히 잘 치뤘다.

편히 쉬세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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