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젠 다 쓰러져가는 보금자리 ~스물라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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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스 -


 아침에 느지막히 눈을 떴다. 오늘은 셋째주 토요일. 쉬는 주다.


 지난주부터 꽂혀있는게 있지만, 망할 메르스 덕에 나의 계획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근데 아침에 눈을 뜨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면 되잖아?'


 생각해보니 나의 목적은 세가지 요소를 만끽(?)하며 궁상 떠는 것이였지 서울에서 체류하는게 아니였다.


 게다가 외박이면 모를까, 당일치기라면 굳이 행선지를 알리면서 요란하게 다녀올 필요도 없지. 난 정말 천재라니까.


 생각 자체는 스치듯 떠오른 것이였지만, 돌파구가 생겼다는 마음에 고민하지 않고 준비를 시작했다.


 당일치기니까 갈아입을 옷은 필요없다.


 책이랑 휴대폰. 음악을 듣기 위한 헤드폰과 여분의 배터리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날씨가 좀 흐렸지만 다행히도 비는 오지 않았다. 다행히 딱 맞는 버스 시간도 있었다.


 정말 오랫만에 동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편한듯 편하지 않은 버스 시트의 감촉마저도 오랫만이라 느껴져서인지, 버스에 타자마자 마음이 짠했다.


 나이가 들어도 나란 인간은 참.. 





 - 메르스가 심각하긴 한가보다 -


 서울에 도착하니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궁상떨기엔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래서는 나다니는데 지장이 있다.


 좋은건지 나쁜건지 헷갈려하며 터미널 매점에서 우산을 하나 샀다.


 구미에선 앵간해선 우산 쓸 일이 없는지라 - 지하 주차장과 회사 바로 앞을 왕복하니.. - 우산이 없었던 것.


 장식하나 없는 투박한 검은색 우산을 하나 사서 가방에 꽂아넣고 지하철을 탔다.


 


 서울에 처음 갔던건 고등학교 2학년 때. 코믹월드를 보러 갔던 것이였다.


 당시엔 여의도에서 열리는 그 만화축제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과는 문화나 인식이 달라서 그런건 좀 그랬거든.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애니메이션 같은것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도 많다.


 또 그 시절의 우리가 그대로 자란탓에 요즘은 20~30대도 서브컬쳐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고.


 물론 지금도 성실히 사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서울에 방문한 이래, 이렇게 2호선 지하철이 한산한건 처음 겪는 일이였다.


 그럴 것이 난 상황상 늘상 주말에만 왔었고, 


 동서울 터미널이 하필이면 제일 붐비는 2호선에 있었기 때문에 어찌됐건 한번은 붐비는 지하철을 탔어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주말이고 2호선인데도 지하철이 굉장히 한산했다.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한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아마 이리도 한산한건 메르스 여파가 아닐까 싶다. 


 구미에 있을 땐 전혀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리보니 나름 심각한 문제긴 했나보다.


 아니, 진행형이니까 심각한 문제겠지.






 - 공원과 책 -


 오랫만이다. 올림픽 공원.


 몽촌토성 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올림픽 공원이 있다.


 처음 올림픽 공원에 왔던 날은 스팀펑크 전시전을 관람했던 날이였다.


 맥주 한잔 마셔도 돼? 하고 허락받고 마셨음에도 삐져서 입을 툭 튀어내고 있었던 왕자님이 떠올랐다.


 올림픽 공원에서 딱히 엄청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올 때마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곳이다.


 서울 사람도 아닌 내게 신기한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다.




 아쉽게도 나의 계획은 첫단추부터 문제가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던 것. 아까 산 우산을 펼쳐들고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지하철 역 출구 기준으로 두번째. 올림픽 공원 구조물을 바라보고 왼쪽.


 늘 앉아서 책을 읽던 곳으로 갔다.


 폰줄을 제대로 꽂지 못해서 디스 당하던 생각이 난다. 생각해보니 예나 지금이나 나는 구질구질한 면이 많았다.


 아무것도 아닌 대리석 난간을 보면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메르스와 비 덕에 공원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우산 하나에 쏙 들어가있는 커플이 지나다닌다.


 그래. 그랬지. 그래. 그렇구나.


 언제고 함께 돌았던 동선대로 한바퀴 돌았다. 여전히 큰 공원이다.




 아쉽게도 비가 오는 덕에 밖에서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맞은편의 던킨 도너츠에서 커피 한잔을 시키고 책을 펼쳤다.


 오사카 소년 탐정단.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된 책이라서 읽기 나쁘진 않았다.


 두번째 에피소드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당일치기라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기도 했고, 또 그 자리에서 읽지 못해서 그런지 맛이 살지 않았다.



 몽촌토성 역 근처를 서성거리며 프린스는 잘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지하철에 올랐다.






 - 향수 -


 왕십리역. 작년 1월 18일에 왔었으니 꽤 오랫만이다.


 다행히 내 기억력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지, 엔터6 입구랑 향수 가게는 어렵지 않게 찾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였는데..




 사실 나는 향수 종류가 그렇게 다양한지 몰랐다.


 내가 아는 거라곤 그 향수가 '야한 향수 추천해주세요'라고 해서 추천 받았던 것과.


 향수 병의 디자인 뿐이였다. 그 가게에서 샀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이였다.


 매장의 판매원 분은 내 기억에도 있는 분이였다.

 

 문제는 내가 하는 설명이 너무 뜬구름 잡는 것이였는지, 해당 향수를 찾지 못하시더라.


 결국 민폐스럽게도 가게의 향수를 죄다 꺼내서 병을 확인해봤는데... 아쉽게도 그 향수는 찾을 수 없었다.



 직원은 '그럼 여자친구분께 향수 이름을 물어보시면 되잖아요?'라고 당연한 요구를 했지만.


 그게 가능하면 이렇게 무택대고 오지도 않았지. 하지만 헤어졌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금 싸움중'이라도 대충 둘러댔다.


 결국 향수를 구입하지도 못하고 엔터6을 나섰다.




 비가 와서 밖에서 책을 읽지도 못하고, 향수도 못 사고..

 

 결국 계획했던 것들은 별만 즐기지도, 만끽하지도 못했다.


 마음이 붕 뜬것까진 좋았는데 그 마음을 다잡을만한 것은 그 어느것도 하지 못했다.


 허탈한 마음에 향수가게 사진을 카톡 남김말로 남겨놨다.




 그리고 터미널로 돌아와 파파이스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먹었다.


 한번 심하게 싸웠을 때 이 파파이스에서 편지를 썻던 기억이 있다.


 어느 장소든 의미만 부여하면 특별한 장소가 될 수 있다니... 


 사람은 감정이란 것 때문에 참 비논리적이면서도 편리하다 싶었다.






 - 왕자님 -


 파파이스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데 느닷없이 톡이 왔다.


 생각지도 않은 톡이였다. 우연찮게 내 프로필 사진을 봤나보다.


 생각해보면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올렸는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요즘 바빠서 출근했다고 한다. 


 모처럼 왔는데 잠시 얼굴이나 보자는 말에. 쌓여왔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지...


 고민이 채 끝나지 않았건만 나는 또다시 한적한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 일하느라 수수하게 입고 화장도 하지 않은 왕자님을 만났다.




 저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어찌보면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사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무슨 난리법석을 피운다 한들 다시 이어질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종교라는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왜 그분들이 나를 싫어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며.


 그리고 당사자인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었던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그 이상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로만 곧이 곧대로 이해하기엔, 불합리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거짓말처럼 이 자리에 와서 마주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왕자님은 여전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구나.


 어쩌면 다시 못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교양있고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저 사람급에 맞는 행동은 해야지... 하는 생각.


 기억이라도 좋게 남아야지. 지금까지처럼 나쁜 기억만 남겨서는 안되잖아.


 그럼. 그렇지.




 하지만 근본이 그모양이였는 듯.


 결국 나는 찌질하고 초라하고 조절장애만 한가득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리고 한결같던 그 사람도, 여전히 한결같이 예쁜 그 사람도 일정 거리 밖에서 눈물 지었다.


 그래. 왠지 모르게 섭섭했던 이 거리.


 처음부터 그 사람은 이 거리를 계속 말하곤 했다. 끝을 늘 말하곤 했다.


 다 이겨낼 수 있을거라던 그때의 안일하던 나에게 지금의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물론 예전과 모든 것이 똑같지는 않았다.


 눈 앞에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왕자님의 감정이 조금 옅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헤어졌다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감각?이 아직도 부족하거나... 둘중 하나 같았다.


 


 무슨 이야길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나는 찌질찌질하면서 조절장애의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좋은 이미지로 그간의 악행을 덮어버리고 싶었는데. 근본이 글러먹어서 그런지 실패했다.


 어차피 저 사람이 내게 다가올 일은 없을 것 같아 다시 붙잡아 보고 싶었다.


 근데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큰 꿈을 꾸었던 것일까.




 이제는 정말. 내가 붙잡아선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 싶었다.


 저 사람이 잡아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집에 오는 버스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비구름이 남부지방까지 왔는지, 도착한 구미에도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나는 왕자님을 동경하는 신데렐라.


 왕자님을 여전히 동경하고 있지만 한번 풀린 마법은 다시 걸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그대를 떠올리며. 


 지금까지와 같이 조용히 그대를 기다리며.


 이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왕자님이 건네는 한마디엔 흔들리지 않아야 겠다.


 그 어느날 왕자님이 미쳐서, 한마디 툭 던지는게 아니라 왕자님이 진정 내게 오길 기다려야지.


 그러다 시간이 흘러흘러. 내 주제에 맡게 성 아랫마을의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면.


 그게 나와 그대의 운명이라고. 그리 생각해야지.






 그런듯 아닌듯 조금 무뎌진 그대의 감정이 서글프지만.


 그런듯 아닌듯 늘 어느정도 거리에서 더이상 다가오지 않는 그대에게 실망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당신이 참 예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