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로자의 날 -
오늘은 근로자의 날. 원래대로라면 쉬는 날이다.
다만 이번주는 석가탄신일, 어린이날 등으로 퐁당퐁당 연휴인지라. 1일과 4일을 교체하기로 했다.
근로자의 날인 오늘 쉬고, 4일날 쉬는 걸로 한 것.
이 이야기는 점심즈음의 이야기.
평소에 식사하는 식당이,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라 근무를 하지 않는댄다.
그런 이유로 오늘 점심, 저녁은 시켜먹기로 했다. 나야 원래 식당밥 안 먹지만, 사람들은 먹어야지.
점심시간을 한시간 쯤 앞둔 11시 즈음. 영우형이 와서 내게 점심 메뉴를 물어봤다.
메모지를 보니 고기덮밥 등의 고오급 메뉴가 기록되어 있었다.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니 고기덮밥(8000원)이 여섯그릇이면 48000원.
이대로라면 하루 식비가 10만원 꼴이다. 평소에 식비가 끼니당 4000원인데, 자그마치 두배다 두배.
남의 돈이면 사람들이 이렇게 돈 쓰는데 아무 꺼리낌이 없구나.
공금을 관리하는 차장형한테 가서 이야기를 하려는데, 차장형이 먼저 내게 말을 꺼냈다.
'회사 돈으로 먹는건데 이리 비싼거 먹으면 안되는거 아님? 추가분은 공금으로 할까?'
마침 생각하던터라 그러라고 했다.
메뉴를 짜장면, 짬뽕, 볶음밥으로 한정하거나, 혹은 초과금은 공금에서 내라고.
잠시후에 박규호 부장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첫 마디는 '식대 지원을 인당 5000원으로 한정시킨건 내 뜻이냐, 사장님 뜻이냐'였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내가 지시한건데 문제 있냐?'라고 대꾸했다.
이후 뭐라고 지껄이긴 했는데 되잖아서 자세히는 기억 안나고... 요약하면 '너무한거 아니냐' 였다.
어쩌다 한번 회사 돈으로 밥 먹는 것이고, 심지어 오늘은 식당이 쉬어서 시켜먹는건데 너무한 것 아니냐. 라는 것.
물론 그럴 수 있다. 평소라면, 아니 예전의 나라면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저는 딱히 부장님한테 이런 소리 들을만한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 사람들한테 물어봐라. 니가 너무한지 안한지!'
'이상한 이야길 하시네요. 제가 식사 대금 결제하는데 직원들 허락을 일일이 받아야 합니까?'
'...'
잠시 정적이 흐른뒤, 박부장이 말했다.
'잠시 따라 나와봐라'
- 심경의 변화 -
일기에 쓰진 않았지만. 대략 한달정도 전이다.
어머니께서 수술을 하셨고. 나와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드나드느라 회사를 좀 비웠다.
회사가 바쁘긴 했지만, 그것들이 엄마 건강보다 중요한건 아니니까.
그리고 금요일.
어머니께서 토요일 퇴원을 앞두고 계셔서 이제서야 한숨 놓을 때였다.
잔업이고 뭐고 하나도 안해서 그런지 일의 진행이 조금 더딘 상태라 주말에 잔업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금요일 점심때, 병원에 다녀온 나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길 들었다.
'오늘 회식 간다'
...어?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회식 간다고? 사장님이 가라고 한거야, 아님 가겠다고 한거야?'
회식을 가겠다고 했단다. 어제 박부장이 회식 이야길 하긴 했지만 난 농담인줄 알았다.
내 가정사는 둘째치고라도, 실제로 일이 밀려 있었으니까.
일이 있으니까, 회식 이야기가 나왔더라도 윗대가리인 박부장이나 차장형이 말렸어야 하는게 나의 상식인데..
차장형의 말로는 박부장이 '현재 진행중인 일은 납기가 없는 일이다'고 했으며,
어머니께서 아픈 것은 '그집 사정'이라고 회식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버지께 따졌다. 왜 회식 가라고 허락하신거냐고. 정작 나랑 아버지는 주말에 일해야 되는데.
그런 내게 아버지께서는 '직원들이 자기 일처럼 일해줄거라는 기대를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그래도 그건...
가끔 민석이랑 이야기 할 때도 느끼지만.
아무래도 사장의 끄나풀인 나는 직원들과는 마음가짐이 다를 수 밖에 없고.
그들에겐 당연한 농땡이가. 내겐 분노 포인트인 경우가 있다.
이때까지는 그런데 상처받곤 했지만, 근래엔 그나마 '차이와 입장의 다름'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일이 있는데도 책임감 따윈 느끼지 않는 부장이나.
그건 그집 사정이라고 말하는 싸가지 없는 개새끼나.
이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게 참..
그래도 이때까지의 나는 그래도. 어지간한 일은 직원 편에서 해결하려고 해 왔는데.
그 모든게 다 부질없음을. 그 순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급속도로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아. 그냥 이새끼들은 다 개새끼구나. 인간 대 인간으로 교류할 필요성이 전혀. 없구나.
기대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겠다.
그렇게 마음 먹었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최소한의 내 업무만 해결하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철저히 줄였다.
귀마개를 하나 사서 대화의 여지를 없앴고.
업무에 있어서도 이때까지는 어렵거나 번거로운 일 위주로 일을 골랐지만, 철저히 무시하고 하나씩 시켰다.
하루 이틀은 불편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 그리고 다시 지금 -
불러낸 박부장은 낭만이 있니 없니, 도리가 아니니 그런 소리를 했다.
사람들 다 불러서 물어보라고. 니가 너무한거 아니냐고.
'아까도 말씀 드린 것 같습니다만'
'제가 그런 결정을 함에 있어 일일이 동의를 받아야 합니까?'
'지난 회식,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때 이후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좋은 기회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업무에 관련된 것들은 지원하고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처럼 부장으로서의 박부장님은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낭만이니, 의리니, 그런 입에 발린 말은 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네요.'
'앞으로는 이런 일로 저 불러내지 마셨으면 합니다.'
라고 했더니.
박부장이 말한다. 그날 자기는 회식의 회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
모든 것은 다 경훈이형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이고, 그래도 자기도 난처하다고 말이다.
이야. 누구 말이 맞던 아무래도 좋지만.
전부다 자기 탓이 아니라고만 하네. 이러면서 뭘 풀자는거지.
저새끼가 나쁜 놈이니까 저새끼 욕하라 이건가. 핫핫.
생각해보면 고작 짜장면 한그릇. 몇천원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불평불만만 많고 잔머리만 굴리며 누리는 것들은 당연하고, 쓰면 뱉고 씹고 이상한 소리나 해대는.
되잖은 인간상에 나도 놀라울 정도로 실망했다.
고립되면 외로울줄 알았는데. 의외로 쾌적하다.
세상엔 쓰레기도 많고. 되잖은 사람도 많고. 생각없는 사람도 많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짖는 사람도 참 많다는걸 깨달았다.
물론 이 모든걸 두루 갖춘 영웅(..)도 있고 말이지.
